냉전시대 배경의 동화 같은 영화다. 포스터나 스틸컷을 보면 무겁고 칙칙할 것 같지만 의외로 유머러스하고 발랄한 분위기였다. 누구나 외롭고 누구나 모자란 점이 있다. 그렇기에 누구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흉측하지만 보다 보면 귀여운 몸짱 인어괴물과 언어장애인인 주인공을 통해 보여준다. 어떻게 괴물과 사랑에 빠지냐든지, 이야기 구조가 유치하고 뻔하다든지, 이런 걸 하나둘씩 따지기 시작하면 이 영화는 온전히 즐기기 어렵다. 아름다운 화면과 음악, 왠지 익숙해서 편안한 전개, 인물들의 감정에 자신을 맡기면 된다. 우리는 각자 고유한 결핍과 보편적인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때문에 너와 내가 같음을 느낄 때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이런 작고 소중한 감정들에 귀 기울이며 보기 좋은 영화다. 되게 ..
문유석 판사의 글은 페이스북에서 처음 접했다. 글이 간결하고 깔끔해서 쉽게 읽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책도 마찬가지다. 길지 않은 깔끔한 글들이 엮여 있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은 건전한 개인주의가 무엇이고 우리 사회에 왜 필요한지에 대해 말한다. 저자가 개인주의자이자 판사로서 바라본 우리 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은 설령 '개인주의자'가 익숙지 않더라도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패거리식 집단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저자의 거부감에 일말의 공감도 못 할 사람은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흔치 않았으면 좋겠다. 여러 편의 글을 엮어낸 책이어서일까. 책의 중반 즈음부터 글의 성격이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기조에 잘 들어맞는 것인지 약간의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은 독일의 한 작가가 술에 대해 쓴 에세이다. 나는 스스로 애주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목과 책 소개를 보고 바로 끌렸다.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크고 작은 실수를 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종종 벌어졌다. 물론 당시에는 크게 반성하고 다짐한다. 실제로 같은 문제가 거짓말처럼 다음날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잊을만 하면 언젠가 비슷하게 겪었던 상황이 재연되고는 한다. 우리나라는 술에 굉장히 관대하다. 우리나라라고 퉁쳐서 얘기할 것이 아니라, 나도 술에 관대하다. 그런데, 술 때문에 벌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한번도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개인에게는 크고 작은 실수로 인한 인간관계나 건강, 알코올 의존 등의 문제가 생긴다. 사회적으로는 음주로 인한 사고와 ..
는 조커의 탄생을 다룬 영화다. 나는 디시코믹스의 세계관이나 역대 조커들을 잘 아는 팬이 아니다. 나에게 조커의 기본값은 의 조커다. 그래도 영화를 즐기기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조커를 식물에 비유하자면 의 조커는 이미 잘 익어서 너무나 먹음직스러운 열매다. 크고, 아름답고, 강렬한 혼돈과 광기다. 는 아서라는 씨앗이 어떤 땅에서 무엇을 양분으로 자라 열매를 맺는지 보여준다.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의 조커가 보여준 화끈한 무언가는 없다. 하지만 가 노잼이라는 것은 아니다. 에서 부각된 조커의 매력은 혼돈이다. 첫째로 조커의 사고와 행동을 예측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우며, 둘째로 조커가 컨트롤하는 상황이 강요하는 선택은 기존의 가치를 흔들어 혼란스럽게 한다. 이 혼란이 고담에 퍼지는 ..
무의미의 축제 로 밀란 쿤데라를 처음 접했다. 그간 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작 손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는 달랐다. 굉장히 얇으니까. 는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다. 영화로 치자면 상당히 지루하지만 한두 번은 미소 짓게 되는 예술영화다. 그리고 아주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우리의 현실, 우리의 일상은 대개 시시하다. 다들 별다를 것 없는 나날들 속에 특별할 것 없는 일들을 겪으며 살아간다. 의미 없는 거짓말, 가볍거나 무거운 감정들, 나름대로 진지하지만 사실 중요하지는 않은 일들,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사람들. 진지한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무거운 감정과 가벼운 감정 따위의 구분은 애초에 정해져 있지 않다. 의미와 무의미는 상대적인 것이다. 이 상대성이 의미와..
는 4개의 짧은 단편소설을 엮은 책이다. 소설이 재미있으려면 일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일상적이지만은 않아야 한다. 이 책에 담긴 각각의 이야기들은 흥미진진하다. 재미가 있다. 아주 짧은 이야기임에도 다음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게 만들고,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더듬게 만든다. 아리송하다가도 이야기의 끝에 다다를수록, "아, 이런 거구나!" 하는 재미가 있다. 소설을 읽는 기분도 들었다. 작가는 작품의 일상성을 가족이라는 소재에서 가져왔다. 가족은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존재다. 남부러울 것 없이 화목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별 수 없다. 가족 중 누군가가 술주정뱅이에 폭력을 휘두르더라도 말이다. 사실 이렇게 극단적으로 갈 필요도 없다. 가족들이 내 맘에 쏙 드는 경우가 어디 얼마..
는 1930년대 미국 남부 어느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풀어낸 이야기이다. 어린 화자가 주는 천진한 귀여움이 당시의 사회상과 맞물려 읽는 재미를 더해줬다. 이 책이 최고의 소설 중 하나라 불리는 이유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인종 차별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내며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아이가 성장하며 내던져지는 세상은 아이에게 모험의 장이 되어준다. 순수의 눈으로 보았을 때 세상은 신비로 가득하다. 메이콤 마을의 스카웃(화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학교에 다닌다는 설렘이 있고, 귀신의 존재에 가슴 졸이며, 마을에는 '부 래들리'라는 공포의 대상이 있다. 한편 세상은 그녀가 불합리한 편견들을 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두 개..
설정의 늪 의 난해함은 나 의 어려움과는 사뭇 다르다. 은 꿈이 단계를 거듭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자칫 흐름을 놓치기 쉽다. 한마디로 쟤네가 뭐하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 는 중력에 엮인 시간의 흐름을 이해해야 감상에 지장이 없다. 중력과 시공간, 5차원 등 어려운 점들을 영화 내에서 나름대로 설명해 준다. 은 과거로의 시간이동과 엔트로피의 역행을 엮었다. 그 자체로 어려운데 영화 내에서 제공되는 설명이 너무나 불충분하다. 이야기 진행의 기반이 되는 설정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러다 보니 유튜브에서는 '스토리 완전 이해'같은 영상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 불친절은 뻔뻔하게도 의도된 것이다. '이해하지 말고 느끼라'는 연구원(?)의 말처럼. 영화는 모순과 오류 가능성을 해소시켜 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은 고독과 불행을 밝게, 심지어는 우스꽝스럽게 그려낸 영화다. 그리고, 마츠코의 일생을 관망하며 살아감에 대한 질문을 던질 기회를 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환상적’이라는 표현은 무언가가 비현실적일 때 쓴다. 일상에서 무언가가 너무 대단해서 찬미할 때 주로 쓰인다. 하지만 종종 환상적인 무언가는 본의아니게도 우리에게 자랑하듯 자신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음을 일깨워주고 우리가 비루한 현실을 마주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츠코의 삶을 보여주며 쓰이는 환상적인 장면들은 아름다운 희망을 경쾌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곧 좌절될 지 모를 꿈의 헛됨을 담담하게 부각한다. 영화 전반에서 계속 반복되는 노래 가사가 의미심장하다. 구부렸다 몸을 쫙 펴서 별님을 잡아보자 구부렸다 몸을 쫙 펴서 하늘에 닿아보자 조그맣게 웅크려 바람과..
는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 중 하나다. 몇 년 만에 다시 본 프랭크는 여전히 씁쓸한 맛이 좋았다. 프랭크, 존, 클라라 프랭크는 왜인지 우스꽝스러운 탈을 쓰고 다닌다. 프랭크는 밴드 '소론프르프브스'의 메인 보컬이고, 비주얼만큼이나 음악적 재능도 유별나다. 밴드의 나머지 멤버도 만만치 않은 괴짜들이다. 소론프르프브스는 대중에게 다가가기 힘들지라도 그들만의 자유로운 음악을 추구한다. 프랭크는 다분히 양면적인 캐릭터다. 그는 단순히 괴짜일 수도, 발군의 재능을 지닌 천재일 수도 있다. 그는 정신병자일 수도, 조금 많이 순수한 사람일 수도 있다. 영화는 관객에게 양자택일을 권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평범한 욕망이 프랭크를 단순히 모자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보여준다. 프랭크의 재능을 선망하는 주인공 존..
억압과 해방 은 07년도에 일본에서 방영된 TV애니메이션이다. 거대 로봇이 나오는 메카물이며, 열정과 우정으로 축약되는 열혈물이다. 또한 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그리는 이야기다. (대)그렌단을 자칭하는 주인공 무리가 헤쳐나가는 억압과 이에 따른 해방은 두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로 지하마을 출신의 그렌단이 지상의 지배자 ‘나선왕’ 로제놈을 무찌른다. 이 결과 인류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급격하게 사회를 발전시킨다. 둘째로, 대그렌단은 인류의 적인 ‘안티스파이럴’의 인류 멸망 계획을 저지한다. 안티스파이럴(=반나선족)이 인류를 멸절하려는 이유는 나선족(작중 인류)이 갖는 ‘나선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선력은 진화와 발전의 원동력이자 욕망으로 묘사된다. 반나선족은 나선족이 스스로 나..
[로마]는 70년대 멕시코를 배경으로 하는 흑백영화다. '로마'는 멕시코시티 내 지역명이라고 한다. 흑백의 필터는 백인 가족과 가정부인 클레오의 피부색 구분을 애매하게 만든다. 비록 피부색을 완전히 같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채도가 0이라는 공통점을 강제로 부여한다. 강제로 부여된 공통점이 피부색의 차이를 상쇄하자 본질이 드러난다. 본질은 남기고 이외의 것을 걸러주는 어떠한 필터를 통해 클레오의 일상 바라보게끔 만든다. 그 필터는 소위 말하는 ‘남성성’에서 기인한 폭력, 억압, 권위주의 따위를 걸러내고, 연대, 공감, 사랑을 남긴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남성성이 발현되기 전인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음... 한숨 나온다. 등장인물 중 그나마 남성성이 강조되지 않는 성인 남성은 클레오가 내적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