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3) 옷 정리를 하다가

옷 정리를 하다가

 오늘은 미뤄왔던 옷 정리를 시작했다. 나는 상당히 최근까지도 옷에 별다른 관심 없이 살았다. 혼자 옷 쇼핑을 해 본 적이 있긴 있었나? 그러다 보니 내 옷들은 대부분 친구가 옷 사러 갈 때 따라가서 사거나, 패션센스 좋은 우리 형이 사준대서 따라다녔거나 하는 식으로 우연찮게 내 것이 되었다. 여간해서는 옷을 새로 사지 않으니 옷장 정리를 자주 할 이유도 딱히 없다. 간만에 박혀있던 옷들을 꺼내어 보니 이게 5년 전일까 몇 년 전일까는 전혀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뭔가'가 기억난다.

 

 이 후드는 KS가 좋아해서 한참 빌려줬다 돌려받았던 옷이고

 저 후드는 처음으로 인스타에서 보고 충동구매했던 거고

 이 조끼는 YB껀데 서로의 옷이 맘에 들어 교환했던 옷이고

 이 반팔티는 여행갔을때 OD가 버릴거라길래 내가 입다가 버린다고 받아온 거고

 저 반팔티 덕분에 스무살때 웃음거리가 됐었고

 요 반팔티는 YB랑 길가다가 갑자기 샀었고

 죠 반팔티는 형이 어릴 때부터 입던 옷이고

 이 청바지는 SH가 사이즈가 더이상 안 맞는다며 내게 줬던 거고

 이 반바지들은 형이 안 입어서 내 것이 되었고

 이런저런 단체티들은 대학교 학생회에서, 고등학교 반티로, 운동하던 클라이밍센터에서 맞췄었고

 이 목도리는 고등학교 때 그룹과외 선생님이 크리스마스였는지 수능이었는지 선물로 한 명씩 사줬던 거고

 이 니트는 누가 예쁘다고 했었고

 저 니트는 누가 사줬었고

 이건 엄마가 사 왔던 건데 이제 다 늘어났고

 저건 엄마랑 같이 옷 구경하다 산 건데 나중에 형이 보더니 뭐 이런 옷을 사줬냐고 엄마에게 면박을 줬었고

 이 신발은 에버랜드에서 발이 너무 아팠고

 저 신발은 누가 골라줬었고

 

 나는 기억력이 안 좋다. 20대 초중반에 술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 이미 치매 소리를 듣곤 했지만. 아마 워낙에 대부분의 것들을 사소하게 여기고, 멋대로 인상 깊던 것들에만 집중하는 내 성향이 기억에도 영향을 미쳐온 것 같다.

 

 오래된 옷들에 나도 몰래 기록된 기억들을 따라가다 보니 덜컥 두렵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이 옷들은 못 입게 될 테고 결국에는 버려야 할 테다. 그때 버려질 것이 옷이 아닌 기억일까 봐 두렵다. 나는 옷이라도 없으면 그런 기억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을게 틀림없는 사람이니까.

 

 기억과 기억의 서술은 다르다. 기억은 결코 온전히 서술될 수 없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따위의 나열은 어느 장면의 맥락, 감정, 분위기, 냄새 등 공간의 실제적·주관적 이미지를 담아낼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일기를 쓰며 기억을 기록하는 이유는 그것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단초가 되어주길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종종 일기를 써야겠다. 옷은 언젠가 버리겠지만 일기는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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